정해춘, 부천FC1995 대표이사

프롤로그 — 수줍게 던진 첫 마디

고등학생 아들이 새벽 서너 시에 들어왔다. 울산으로, 부산으로, 원정 버스를 타고 팔도를 떠돌았다. 정해춘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대체 무엇이 자식을 저렇게 만드는가. 확인하러 갔다. 부천종합운동장으로.

서포터즈석 뒤편에 섰다. 아들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공부나 하지, 왜 저러나" —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자리에서 뛰지 않으면 나가라는 서슬 퍼런 청년들의 눈빛과 마주쳤다. 열악한 스탠드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팀을 향해, 청춘들이 목을 걸고 있었다. 그 풍경이 한 남자의 마음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북소리가 작으면 내가 사주겠다 —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들을 잡으러 온 아버지는, 그렇게 서포터즈 헤르메스의 일원이 되어갔다. 그것은, 그가 수줍게 처음 던진 부천구단을 향한 목소리였다.

아들의 꿈을 대신 짊어지다

2006년, 부천을 떠받치던 팀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연인을 잃은 사람처럼, 아들은 슬퍼했다. 그리고 여전히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정을 다해 응원하던 아들의 또래들을 보며, 정해춘은 자연스럽게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 마음이,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자식 또래의 청년들이 팀을 만들겠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들의 꿈이기도 했기에, 그 꿈을 이뤄주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 여겼다.

그래서 팬들은 결심했다. 떠난 팀에 구걸하느니, 우리가 팀을 만들자.

2007년, 창단 시민모임의 이사진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직업을 가진 이들이 주중엔 각자의 생업으로, 주말엔 무보수 자원봉사로 구단을 떠받쳤다. 연 회비는 20만 원이었지만, 실제로 쓴 돈은 한 사람당 천만 원에 달했다.

29218.jpg

이사진의 맏형 —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사무실 임대료를 도맡은 것도 그였다. 그가 운영하던 덕산파이프는 연간 500만 원에 부천경기장 입간판 광고를 자처한 유일한 기업이었다.

낮에는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이사였다. 그러나 퇴근 후에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정치인과 스폰서를 만나러 다녔다. 왜 부천에 축구팀이 있어야 하는지, 그는 매번 처음부터 다시 설득해야 했다. 또래의 사업가들과 친구들은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렇게 사나" —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스스로 택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을, 그는 아들과 헤르메스와 부천 시민들에게 돌리며 늘 겸손하게 말하곤 했다. 자신은 그저 작은 힘을 보탰을 뿐이라고.

3억 원의 예산으로, K3리그의 문을 두드렸다. 2007년 10월 10일,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창단 설명회가 열렸다. 그날의 사진 속에도 그는 있었다. 이후 단장을 거쳐 대표이사가 될 사람이라고, 당시 현장을 기록하던 이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 "구단의 큰 형님." 그리고 2007년 12월 1일, 부천FC1995가 태어났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걱정과 고독

곁에 있던 서포터즈 동지들도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창단에 쏟으시면 회사도 어려워지고, 그 피해가 가족에게까지 가지 않겠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때마다 그는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 길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창단이 확정되고 창단식이 열리던 날. 사람들이 흩어지고 난 뒤, 그는 혼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성취감과 고독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눈물이었다.

넘어도 넘어도, 다시 산

그러나 창단 이후에도 꽃길은 없었다. 그의 앞에는 늘 거대한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한 산을 넘으면, 그 뒤에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산은 늘 부족했고, 빚은 쉽게 줄지 않았고, 성적은 늘 벼랑 끝이었다.

29214.jpg

몇 번이고 단장이나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을 후배들에게 넘기는 것은, 그에게는 죄를 짓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매번, 다시 짐을 짊어졌다.

단장, 그리고 사비로 막은 빚

2009년, 경향신문은 그를 "부천FC 단장"으로 소개하며 이렇게 적었다. 파이프 공장을 운영하는 정해춘 단장은 3천만 원짜리 A보드 광고주라고. 그러나 광고만이 아니었다. 구단에 급전이 필요하면, 그는 자기 돈으로 해결했다.

축구에 미친 아들을 잡으러 온 아버지가, 지금은 아들보다 더했다.

같은 해 7월, 부천FC는 잉글랜드의 팬 소유 구단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와 드림매치를 가졌다. 단장 자격으로 나선 그는 부천을 "시민이 만든 팀"이라 소개했다. 시민의 팀이라는 말을, 그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본인이 매달 감당하는 청구서로 증명하고 있었다.

2010년 12월 18일, 구단은 법인등기와 함께 그를 대표이사로 세웠다. 2011년, 뉴시스는 부천시와의 홍보협약 기사에서 그를 다시 "단장"으로 적었다. 직함은 이렇게 흔들렸다. 이사에서 단장으로, 단장에서 대표이사로, 다시 단장으로 — 그리고 2015년 3월 27일, 구단 공식 연혁은 그의 대표이사 취임을 다시 한 번 기록했다.

직함이 흔들리는 동안에도, 자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늘 거기 있었다.

29211.jpg

3부에서 2부로, 처음 넘은 산

그리고 2013년, 마침내 하나의 산을 넘었다. K3리그에서 시작한 팀이, 프로 무대인 K리그 챌린지 — 지금의 K리그2 — 의 문을 두드렸다. 오랜 적자와 만년 하위권을 견뎌온 이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리그 이동이 아니었다. 팬들이 맨손으로 만든 팀도, 프로의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러나 정해춘은 그 순간에도 마냥 웃지 못했다. 프로화는 곧 더 큰 예산, 더 큰 책임을 뜻했다. 산 하나를 넘으면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장의 자리, 두 개의 집

회사는 덕산파이프였다. 집은 부천의 어느 가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집이 있었다 — 부천FC1995.

29212.jpg

세 개의 자리를 한 사람이 동시에 짊어졌다. 회사가 흔들리면 가정이 흔들리고, 구단이 흔들리면 그 돈은 결국 회사와 가정에서 새어 나갔다. 구단이 고금리 채무로 신음할 때, 그는 회사 자금과 개인 자금을 구분하지 않고 밀어 넣었다. 무상으로 출연하거나 빌려준 돈만 약 13억 원. 그는 10여 년의 재임 동안 월급을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구단 이자가 너무 비싸 제 돈과 덕산파이프의 돈으로 먼저 갚고, 그 이자는 따로 돈 나갈 일 없게 광고비로 대신했다." — 그의 담담한 고백이다.

담담해서, 더 무거웠다.

집안에서 불만이 없었을 리 없다. 주말이면 경기장에, 평일이면 회사와 구단의 장부 사이에 파묻혀 있는 가장을 향해, 가족의 서운함이 쌓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자신도 언젠가 "축구가 제 삶의 일부가 되어서 경기가 열리는 토·일요일이면 집에서 내놓은 남편이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웃음 뒤에 남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을 후회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 회사의 이익도, 가정의 저녁 시간도, 그가 구단에 쏟아붓는 시간 앞에서는 뒷전으로 밀렸다. 선수단에게 그는 대표이사이기 전에 큰형이었다. 이기고 지는 모든 경기에, 그는 일 분 일 초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않았다.

원정을 따라다녔다.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해외 전지훈련이나 원정 경기가 있으면, 그는 선수단을 따라가 손수 회식 자리를 마련하고 사비로 계산을 치렀다. 큰돈을 쓰는 기업 구단처럼 화려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형이 동생들 밥을 사듯, 그는 그렇게 선수들의 사기를 챙겼다. 클린구단을 선언한 구단이었다. 외부의 청탁도, 부적절한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자리였다. 그런 원칙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아끼지 않은 것은, 자신의 지갑에서 나가는 밥값이었다.

가정의 가장이 식구들의 저녁을 책임지듯, 그는 선수단의 저녁을 책임졌다.

클린구단, 그리고 숨은 조력자

2019년, 부천FC는 스스로를 "클린구단의 원년"이라 선언했다. 시민구단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선언은 쉬웠다. 실천은 혹독했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잔재를 걷어내는 작업에 앞장선 것은 당시 사무국 팀장이었던 문재식이었다. 각계의 부탁을 거절하고, 원칙을 지키다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공무원으로서 그렇게까지 원칙을 지키니 공격도 많이 당하더라." 정해춘은 그렇게 회고했다. 청소 작업에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도 했다.

10년의 재임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묻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문재식.

아껴둔 이적료 수익이, 결국 승격의 실탄이 되었다. 정해춘과 감독은 그 돈을 팀 강화에 쏟아붓기로 결단했다. 빚도 갚았고, 여유도 생겼으니.

자신의 공을 남에게 돌리는 것. 그것이 그가 이 구단에서 가장 오래 지켜온 습관이었다.

시의회의 증언대에서

2021년, 부천시의회 행정사무감사. 그는 증인석에 앉았다. 구단의 재정, 후원금, 팬들의 모금운동, 운영 전반에 대해 시의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는 하나하나 직접 답했다.

기업구단이 부천을 떠난 뒤, 시민들이 스스로 축구단을 만들었던 그 자긍심을 그는 다시 설명했다. 그리고 강한 표현을 썼다. 부천FC는 자신에게 "분신과 같은 구단"이라고.

증언대라는 자리는 누구에게나 방어의 자리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는 방어보다 고백이 많았다.

확장, 그리고 여전히 가난한 살림

2021년에서 2022년 사이, 부천FC는 스페인 스포츠 브랜드 켈미(KELME)와 4년 총액 약 20억 원 규모의 용품 후원 계약을 맺었다. 그의 재임 동안 구단의 사업 구조가 조금씩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2026년, 계약 연장 소식이 다시 전해졌을 때도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2022년의 목표와 2026년의 K리그1 승격을 하나의 문장으로 이었다.

2017년에는 대한축구협회와의 업무협약에, 2018년에는 부천FC 사회적협동조합 및 부천시축구협회와의 협약에 그가 직접 참석했다. 지역사회 기여와 축구 저변 확대 — 그가 반복해서 강조한 말이었다. 화려한 확장이 아니었다. 가난한 살림 안에서, 한 뼘씩 넓혀가는 걸음이었다.

대서양 건너, 닮은 얼굴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 잉글랜드에도 닮은 얼굴이 있었다. 엑서터시티(Exeter City)의 데니스 왓츠(Denise Watts).

30368.jpg

그녀 역시 시작은 평범한 부모였다. 2002년의 어느 춥고 비 오던 아침, 어린 두 아들이 처음으로 축구를 보러 가자고 졸랐다. 축구와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휴대폰과 뜨개질거리를 챙겨 들고 따라나선 그 하루가, 훗날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꿔놓을 줄은 몰랐다.

당시 엑서터시티는 400만 파운드가 넘는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팬들은 서포터스 트러스트를 만들어 자원봉사로 구단을 떠받쳤고, 그녀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처음엔 그저 돕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자원봉사자에서 이사로, 이사에서 트러스트 의장으로, 그리고 마침내 구단 전체의 회장으로 — 정해춘의 궤적과 놀랍도록 닮은 길을 그녀도 걸었다.

전일제 교사 출신 영업직 직장인이었던 그녀에게, 이 자리는 무보수였다. 월례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매년 연차 12일을 썼고, 원정 경기까지 따라다녔다. 채권자들과 씨름하며 400만 파운드가 넘던 부채를 청산했고, 구단을 빚 없는 흑자 클럽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리고 2008년과 2009년, 구단은 연달아 승격에 성공했다.

2010년, 그녀는 스스로 물러났다. 떠나며 남긴 말은 담백했다. 구단에서 우표 한 장 챙겨 나온 적이 없다고, 모든 것을 무보수로 했다고.

바다 건너, 언어도 다르고 시대적 배경도 다르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같은 문장으로 수렴한다. 팬이었던 사람이, 구단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다는 것. 그리고 그 헌신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는 것.

정해춘이 부천의 큰형이었다면, 데니스 왓츠는 엑서터의 어머니였다.

승격의 밤, 눈물의 이유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 갈레고의 세 번째 골이 터진 순간, 그는 승격을 확신했다. 그런데 그 확신이 기쁨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서포터즈석으로 달려갈 때, 그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이제 1부로 올려놨으니 내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하지만 울고 나니 바로 내년 걱정이 앞섰다."

기쁨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데는,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21년 만의 1부 복귀. 부천SK로 시작해 팀이 사라지고, 팬들이 다시 3부 팀을 만들고, 2부를 거쳐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여정. 그는 그 모든 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승격의 환희 대신 예산 걱정을 먼저 끌어안았다.

"승격을 목표로 하는 대표이사라면 매년 사재로 1억 원 이상을 쓸 각오가 필요하다." 그가 남긴 말이다.

기쁨을 유예하는 것 — 그것이 그가 이 자리에서 배운 유일한 생존법이었는지도 모른다.

2024년, 시민이 인정한 이름

2024년, 제1회 부천시 시민대상 체육진흥 부문. 그가 수상자였다. 부천시가 공식적으로 적은 공적은 이러했다.

"부천FC 대표이사로 부천시 대표 시민프로축구단 부천FC의 발전을 위해 투철한 사명감과 시민이 하나되는 구단이라는 마인드로 시민의 건강한 여가활동에 기여."

그리고 그의 약력에는, 단순한 "대표이사"라는 한 줄이 아니라 "전 부천 축구클럽 창단 시민모임 회장"이라는 문장이 함께 적혔다. 부천시가 공식적으로, 그의 출발점이 팬이었음을 인정한 순간이었다.

분신

아들을 잡으러 왔다가, 아들보다 더 깊이 빠졌다. 이사가 되고, 단장이 되고, 대표이사가 되고, 무급으로 13억 원을 구단에 쏟아붓고, 선수들의 밥값을 사비로 치르고, 승격의 밤에도 눈물의 이유가 기쁨이 아니라 걱정이었던 사람.

그는 자신의 희생을 스스로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곁에서 조용히 지켜본 이들은 안다. 그는 인생의 모든 것을 도박을 하듯, 이 구단 하나에 걸었다.

부천FC1995의 역사에서, 그는 화려한 조연을 자처한 적이 없다. 그저 가장 오래, 가장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킨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출처 구분

언론 보도

  • 한겨레, 「팬을 버리고 떠나? 그래서 우리가 팀을 만들었다」, 2008.12.12

  • 경향신문, 「K3 부천FC "서포터스 사랑먹고 크죠"」, 2009.05.19

  • 스포탈코리아, 부천FC-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 드림매치 기사, 2009.07

  • 뉴시스, 부천시-부천FC 홍보협약 기사, 2011.02.07

  • 골닷컴, 부천FC 2013년 K리그 챌린지(2부) 프로화 관련 기사

  • K리그 공식 기사, 2017년 KFA 업무협약 / 2018년 부천시축구협회 협약

  • 부천시 공식 홈페이지, 제1회 부천시 시민대상 공적·약력, 2024

  • 부천FC 공식 구단 연혁 (2010.12.18, 2015.03.27 대표이사 취임 기록)

  • The Grecian Archive (University of Exeter), 「2006–2010 Denise Watts」 — 엑서터시티 서포터스 트러스트 의장 및 구단 회장(2006–2010) 재임 기록, 본인 구술 회고(2019년 작성) https://grecianarchive.exeter.ac.uk/items/show/3619?utm_source=chatgpt.com

본인 육성 증언 (인터뷰·발언 기반)

  • 부천뉴스, 「눈물 많은 남자, 가난한 시민구단 부천FC1995를 1부로 이끈 정해춘 대표의 '헌신과 책임'」, 2026.01.30

  • 부천시의회 2021년 행정사무감사 회의록 — "분신과 같은 구단" 발언

  • 부천타임즈, 2026시즌 출정식 발언, 202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