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출발점, 왜 수원삼성이 하면 '서포터즈'고 부천이 하면 '팔도 유랑단'인가?
※ 아래 노란 형광 처리된 부분은 수원삼성 서포터즈 측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직접 인용하고 게시한 기록물들의 실제 문구입니다.
수원삼성 서포터즈 측은 1995년 동대문 유공 응원석의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줄기차게 하나의 논리를 밀어붙여 왔습니다.
"1995년 하이텔 축구동은 특정 팀에 대한 소속감 없이 여러 팀을 섞어 응원하던 '팔도 유랑단'이자 '프로젝트 모임'이었을 뿐이므로, 진정한 서포터즈의 시작이라 볼 수 없다."
이것이 그들이 전향 이력을 세탁하고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면에 내세우는 핵심 방패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간과한 치명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휘두른 그 칼날이, 정작 수원 삼성 서포터즈 스스로가 남긴 역사적 기록물과 결합하는 순간 자신들의 목을 찌르는 완벽한 자기모순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직접 인용하고 작성한 글 속에 박제된 치명적인 모순들을 낱낱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모순 ① : 유공 응원석의 '유랑단'이 수원으로 가면 갑자기 '진짜 서포터'가 되는가
수원 측이 정통성 부정의 근거로 내세우는 칼럼의 논지는 아주 확고합니다.
"1995시즌 당시 하이텔축구동호회의 단체 관람은 '새로운 응원문화의 창출' 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운동장에서의 실현하기 위해 각팀의 팬들이 연합하여 결성된 프로젝트성 모임이었을 뿐 한 팀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가지고 그 팀의 승리를 바라는 응원활동은 결코 아니었다. 서포터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 바로 팀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1995년 하이텔 축구동호회가 최초의 서포터 조직이라고는 규정짓기는 어불성설일 것이다."— 수원 측 인용 칼럼 중
이 논리대로라면 95년 동대문 유공 스탠드에 모였던 사람들은 충성심이 없는 '팔도 유랑단'일 뿐이므로 서포터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공 응원석 현장을 주도했던 수원 서포터즈 창립 주역의 회고록을 보면 아주 황당한 고백이 튀어 나옵니다.
"저 원정 응원단 4명 중 3명은 나중에 수원 서포터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중략) 당시 같이 유공을 응원했던 울산 분들은 나중에 처용전사를 만들었고 포항의 그 팬들은 포항 서포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수원 서포터를 만들었습니다. 모두 95년 하이텔 축구동 멤버들이 해낸 일입니다."— 수원 서포터즈 창립 주역 회고록 중
여기서 지독한 논리적 파탄이 발생합니다. 수원의 주장대로라면 95년 축구동은 소속감도 충성심도 없던 자격 미달의 집단인데, 그 자격 미달 집단의 원정 응원단 4명 중 3명이 그대로 이동해서 만든 것이 바로 수원 삼성 서포터즈의 시초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바뀐 게 아닙니다. 95년 동대문에서 대북을 치고 깃발을 흔들며 대한민국 서포팅 리딩의 기초 메커니즘을 정립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96년에 응원하는 '대상(팀)'만 수원삼성으로 바꾼 것뿐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을 두고 "유공을 응원할 때는 충성심 없는 유랑단이니 서포터가 아니고, 수원삼성을 응원할 때는 첫날부터 위대한 최초의 서포터즈"라고 규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자랑하는 기적의 논리이자 앞뒤가 맞지 않는 유치한 이중 잣대입니다.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유랑단 출신들이 모여 만든 수원 서포터즈 역시 초기 정통성을 통째로 부정당해야 마땅합니다.
모순 ② : 구단의 '지원'을 받으면 알바인가, 선진 마케팅인가?
수원 삼성 서포터즈측 칼럼은 유공 구단이 축구동에게 북을 지원하고 협조했던 관계를 서포터가 아닌 이유로 깎아내립니다.
"축구동호회와 유공 구단간의 관계가 한계점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축구동호회를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치어리더를 위한 응원집단의 존재쯤으로 생각하는 유공 구단의 인식이었다. (중략) 결국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서 시작된 협조 관계였지만 다양한 팀을 좋아하는 팬들이 모인 탓에 팀에 대한 충성도는 희박했고 구단 역시 자발적으로 구성된 팬들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수원 측 인용 칼럼 중
구단의 지원을 받거나 이해관계가 맞물린 응원은 '자발성이 없는 치어리더 수준'이라는 논거입니다. 그렇다면 수원삼성서포터즈는 어땠을까요? 수원의 역사 기록을 보면, 95년 말 수원 구단 관계자가 축구동 송년회에 찾아와 대기업의 자본력과 "유럽식 클럽 운영, 성인층 겨냥 마케팅"을 제안하자 축구동 인재들이 대거 수원삼성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수원삼성측에 많은 지원과 혜택을 받은걸로 사료에 남아 있습니다.
구단과 조율하고 지원을 받은 행위를 두고 유공이 하면 "개념 없는 구단과 충성도 낮은 치어리더의 결탁"이 되고, 수원이 하면 "선진 마케팅에 감명받은 선구자적 서포터즈의 탄생"이 되는 것입니까? 타 팀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세운 기준이 자신들의 창단 스토리까지 '구단 마케팅에 휘둘린 응원단'으로 격하시키고 있음을 왜 모릅니까.
모순 ③ : "포철 팬이 가장 많았다"면서 왜 정통성은 수원삼성이 독점하는가?
수원삼성서포터즈 측 칼럼은 당시 동대문 응원석의 인원 구성을 언급하며 부천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합니다.
"당시 단체관람 응원에 참가하는 회원들 중 '황선홍 홍명보 라데'가 소속되어 있는 포철 아톰즈를 좋아하는 회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중략) 유공과 포철과의 경기에서는 유공의 홈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동호회 인원들이 반으로 갈려 유공 구단에서 지원한 북 두 개 중 한 팀은 유공을, 나머지는 포철을 응원했다."— 수원 측 인용 칼럼 중
유공 팬들만 모인 자리가 아니었으니 유공(부천)의 독점적 역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백번 양보해 이 논리를 수용해 봅시다. 그렇다면 당시 유공 응원석에서 가장 큰 지분과 머릿수를 차지했던 것은 '포철 팬들'입니다. 심지어 95년 당시 수원삼성이라는 팀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공 팬들만의 모임이 아니었으니 부천의 정통성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수원이, 왜 95년 동대문 유공 응원석에서 꽃피운 한국 서포터 문화의 정통성과 유산은 자신들의 것이라며 독점하려 합니까? 남의 옷을 입고 자기 옷이라 우기는 꼴입니다.
모순 ④ : 뿌리는 위대하다 찬양하면서, 그 토양은 부정하는 형용모순
수원 측이 제시한 칼럼의 말미에는 결국 숨길 수 없는 진실이 고백되어 있습니다.
"당시 하이텔 축구동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축구응원은 엄청 늦게 도입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획기적인 응원방식이 없었다면 아직도 축구장에는 응원단장과 치어리더 엠프 응원이 진행됐을 수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 이들이 있기에 저희만의 응원방식이 생겼고 이들이 있기에 대한민국 축구도 발전된 거 같습니다."— 수원 측 인용 칼럼 중
본인들이 올린 사료 안에서도 이미 인정하고 있습니다. 1995년 동대문 유공 응원석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이 있었기에, 맨땅에서 대북을 치고, 대형 깃발을 만들고,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는 '한국형 서포터즈 문화의 기초 기술'이 정립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실험실에서 축구 응원의 메커니즘을 학습한 인재들이 96년 각 구단의 서포터즈로 흩어지며 K리그 서포터 문화의 문이 열렸습니다. 수원삼성 역시 그 흐름 위에서 유공 응원석의 노하우와 인력을 그대로 수입해 간 수혜자 중 한 팀에 불과합니다.
축구동의 획기적인 응원 방식 덕분에 지금의 자신들이 존재한다고 찬양하면서, 그 방식과 노하우가 실험되고 완성된 무대인 '유공 응원석'은 서포터가 아니라며 선을 긋는 행태. 이것이 바로 앞뒤가 맞지 않는 형용모순의 극치입니다.
"우리의 시작도 이러했다" — 외로웠던 뿌리에 대한 리스펙
수원삼성서포터즈 관계자의 글을 보면 당시의 척박했던 환경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단 4명이서 거대한 대북을 들고 고속버스를 타며 울산으로, 포항으로 원정을 다녔던 눈물겨운 기록입니다.
"모인 인원은 총 4명.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떠났죠. 네명이서 그 큰 북을 들고 버스타고 울산까지 갔습니다. (중략)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있어도 뭉치지 않을 수 없는 때였고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팀의 상대편을 응원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들죠?"— 수원 서포터즈 창립 주역 회고록 중
솔직히 이 기록들을 읽으며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던 이유는, 사진과 글 속에 담긴 그 외롭고 눈물겹던 초창기 뒷모습이 바로 얼마 전 우리 부천의 모습이었고, 우리의 시작도 정확히 이러했기 때문입니다.
맨땅에서 깃발 하나 들고 동대문 스탠드에 섰던 그 시절, 우리 역시 인원이 적었고 외로웠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오직 축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스탠드를 지켰던 저 시절의 모든 개척자들에게 저는 진심 어린 존경의 리스펙(Respect)을 보냅니다.
서포터즈의 본질은 숫자의 비대함이나 대기업의 자본 지원이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맨땅 위에서도 내 팀을 위해 스탠드에 당당히 서는 의지, 바로 그것입니다.
뿌리를 부정하면서 열매만 독점하려는 오만함
수원삼성서포터즈는 서포터즈의 뿌리가 95년 하이텔 축구동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증명했고, 그 하이텔 축구동이 95년 동대문 유공을 지지하며 응원 기반을 닦았다는 것도 그들이 증명했습니다.
자신들의 출발점이 직전까지 유공을 응원하던 집단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해 놓고, 이제 와서 "유공 시절은 서포터가 아니었다"고 선을 긋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입니다. 뿌리를 통째로 부정하면서 그 뿌리에서 자라난 열매와 독점적 기득권만 챙기려는 행태는 역사를 다루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포터 문화의 정통성과 시작이 1995년 동대문 유공 응원석에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억지 주장이 아닙니다.
바로 수원삼성, 당신들이 역사의 증거이자 팩트라며 직접 인용하고 남겨둔 기록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관련 사료 및 원문 링크
수원 서포터즈 초창기 주역의 회고록 및 당시 울산/포항 원정 기록 원문
https://m.blog.naver.com/kerrysnaiper/30105122814?recommendTrackingCode=2
원정 응원단 인원의 수원 서포터즈 창립 주도 및 타 구단 서포터즈 분화 과정 기록
https://m.blog.naver.com/kerrysnaiper/30105123125?recommendTrackingCode=2
대한민국 서포터 역사 비평 - 하이텔 축구동과 최초의 서포터 논쟁 (上)
동대문 운동장 유공 코끼리 단체관람 응원의 안착과 연합 응원단으로서의 한계 분석
https://m.blog.naver.com/kerrysnaiper/30105124358
대한민국 서포터 역사 비평 - 하이텔 축구동과 최초의 서포터 논쟁 (中)
유공 구단과의 공조 및 갈등, 팔도응원단 정의와 충성도 논란에 관한 수원 측 인용문
https://m.blog.naver.com/kerrysnaiper/30105124770?recommendTrackingCode=2
대한민국 서포터 역사 비평 - 하이텔 축구동과 최초의 서포터 논쟁 (下)
하이텔 축구동이 대한민국 축구 응원 문화 발전과 붉은악마 탄생에 미친 영향 총평
https://m.blog.naver.com/kerrysnaiper/30105125443?recommendTrackingCod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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