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하이텔의 한 게시판에서, 2026년 부천종합운동장까지

사람들은 화석을 볼 때 묻는다. 이게 정말 그 시절부터 있었던 게 맞냐고.
양원석에게도 같은 질문이 따라붙는다.
1993년, 아직 K리그에 '서포터즈'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PC통신 하이텔의 작은 축구 동호회 게시판에서 부터 지금까지 — 그는 단 한 번도 스탠드를 떠난 적이 없다. 팀은 몇 번이나 이름을 바꿨고, 리그를 오르내렸고, 사라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건 딱 하나, 그가 여전히 거기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숨 쉬고 뛰고 소리 지르는 화석.
1. "6,742일", 그가 셌던 이유
숫자를 세는 사람은 대개 둘 중 하나다. 회계사이거나, 사랑에 빠진 사람이거나.
양원석은 후자였다. 아마추어 팀으로 K3에서 시작한 팀이 K리그1로 돌아와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첫 승을 올리기까지, 그는 그 날짜를 하루도 빠짐없이 셌다. 6,742일. 스무 살 청년이 마흔을 지나 쉰이 훌쩍 넘도록 기다린 시간이다. 팀이 없어질 뻔했던 밤도, 아무도 오지 않는 관중석에 혼자 앉아있던 낮도 다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가 마침내 채워지던 날, 그는 화면 앞에서 이렇게 적었다.
"집에서 보면서 눈시울이 벌게지더군요."
경기장이 아니라 집이었다는 게, 어쩌면 더 사무친다. 30년 넘게 뛰어다니고, 소리치고, 짐을 나르던 사람도 결국은 화면 너머 혼자 있는 방에서, 조용히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는 날이 있다는 것. 그 흔한 승리의 세리머니도, 얼싸안을 동료도 없이. 그런데도 그는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을 다독이지 않았다. 대신 팀을 향해 말을 건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그 다음, 그 다음 잔치를 향해 가고 이루어질 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는 것을 믿습니다."
가장 울고 싶은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아니라 팀의 안부부터 물었다. 기다림을 끝맺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림을 이어가는 사람. 그게 양원석이다.
2. 1998년, 국경을 넘던 몸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도쿄대첩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사람들은 물었다. "본선 가면 프랑스도 가야지, 안 갈 이유가 있어?" 양원석에게 그 질문은 애초에 질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IMF로 환율은 반 년 만에 두 배 가까이 뛰었고, 유럽 직항 항공권은 왕복 100만원을 훌쩍 넘었다. 그래서 그는 김포에서 타이베이, 방콕, 스톡홀름을 거쳐 파리로 가는, 뺑뺑 도는 경유편을 택했다. 시간은 오래 걸려도 돈은 아낄 수 있었으니까.
떠나는 날 배낭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 있었다. 파리에 사는 정성우 형에게 줄 만화책 200권, 30m 로프, 맥가이버 나이프, 미군 전투식량. 동료들은 그를 보고 "서바이벌 게임 가는 거냐"며 웃었다. 그는 응원용 베이스드럼과 북채 10개까지 자기 몫으로 챙겼다.
공항에는 고(故) 양광성 형님이 배웅을 나왔다. 그는 양원석의 손에 100달러를 쥐어주며 말했다.
"너 돈 모자를거 같아서 보태준다. 가서 잘 쓰고 못가는 내 몫까지 소리지르고 와라. 20kg 이상 안빠져서 오면 넌 나에게 죽을줄 알어."
'못 가는 내 몫까지' — 그 한마디가 이 이야기의 무게중심이다. 누군가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고, 그래서 갈 수 있는 사람에게 자기 몫의 함성을 맡겼다. 양원석은 30kg이 빠진 채로 돌아왔다. 약속보다 더 많이 태워버린 몸이, 그가 그곳에서 자신의 몫과 형님의 몫을 함께 지고 얼마나 뛰고 소리 질렀는지를 대신 증언한다. 그리고 지금, 그 몫을 맡겼던 양광성 형님은 세상에 없다. 양원석이 지금도 그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남기는 이유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필사적이었던 순간은 방콕 돈므앙 공항이었다. 스톡홀름행 환승까지 남은 시간은 15분. 그런데 18명 전원의 항공권을 그 자리에서 다시 발권해야 했다. 표를 손에 쥐자마자 누군가 소리쳤다.
"뛰어!!! 뛰라고!!! 늦으면 안 돼!!!"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전력 질주가 시작됐다. 축구선수 출신 조승옥은 동료의 짐까지 대신 짊어지고 뛰었고, 일행 중 가장 연장자였던 전명준도, 막내였던 여경택도 함께 달렸다. 도보로 25분 걸리는 거리를, 그날 그들은 10분 만에 주파했다. 2년 뒤 같은 길을 다시 걸어본 양원석은 그제야 실감했다. '그때 진짜 절실했구나.'
3. 기록하는 사람
뛰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모든 순간을 몸에 새기듯 기억했고,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그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 문장으로 옮기고 있다. 「Allez Corée」라는 이름의 연재는 그렇게 태어났다. 항공권 가격, 환율, 짐의 무게, 누가 무엇을 들고 뛰었는지까지 — 28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복원해내는 그 집요함이야말로, 그가 왜 '살아있는 화석'인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화석은 그저 남아있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의 결을 그대로 품고 있어야 화석이다.
그는 또한 대원출판사의 만화잡지 『챔프』에 연재되던 축구만화 '슈팅'에 가상 월드컵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다. 원고료로 받은 만화책 100권은, 훗날 파리에 있는 정성우 형에게 전할 선물이 되어 그의 배낭 속에 다시 담겼다. 축구에 대한 사랑과 만화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한 사람 안에서 우연히 만나, 다시 원정길의 짐이 되었다.
4. 그가 아직도 서 있는 이유
양원석의 이야기에는 승리의 순간보다 준비하고, 뛰고, 기다리는 순간이 훨씬 많다. 그건 아마 서포터라는 존재의 본질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늘 그라운드 위 선수들의 몫이고, 스탠드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양원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이텔 게시판에서 시작해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이기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와 함께 뛰었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누군가는 조용히 스탠드를 떠났다. 그런데도 그는 남아서, 그들의 이름과 그날의 온도까지 하나하나 기록해왔다.
이제는 그 시간 자체가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부천이라는 팀이, 그리고 한국 축구의 서포터 문화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몸으로 증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로.
세월은 그의 몸에도 흔적을 남겼다. 이제는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예전처럼 매 경기 경기장을 찾지는 못한다. 하지만 몸이 스탠드에 없는 날에도, 그의 마음은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화면 앞에서든, 병상에서든, 그는 여전히 부천의 서포터다. 서 있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 그가 서 있다는 사실 자체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6,742일을 세던 그 사람은, 아마 지금도 다음 숫자를 세고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화석은, 화석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뛴다.
그리고 그가 오랜 세월 스탠드에서 몸으로 배운 것을,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서포터의 본질은 이름에 있는 게 아니다.
스탠드에 서고, 목소리를 내고,
마음으로 응원하는 그 열정에 있다."
이름은 잊혀도 열정은 남는다. 화석이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 그러하듯, 양원석은 그 말 그대로의 삶을 지금도 살고 있다.
● 참고 자료 (부천 서포터즈 아카이브 · 관련글)
카툰 "고오오올인" 양원석 글 / 최대성 그림 (대원씨아이(단행)(대원키즈) 2002.05.31.)
「'6,742'일의 기다림」, 관련글 43번, 26.05.24
「1998월드컵 원정응원기 - Allez Coree 1화 (프랑스 원정의 시작)」, 관련글 49번, 26.05.24
「1998월드컵 원정응원기 - Allez Coree - 3화」, 관련글 71번, 26.06.13
「Allez Coree - 4화 (Road to France)」, 관련글 75번, 26.06.27
「Allez Corée 5화 (뛰어! — 방콕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길)」, 관련글 79번, 2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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