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마이크로필름 보관실에서 시작되어 동남아시아의 먼지 쌓인 서고까지 이어진 집념

사람들은 축구 서포터를 흔히 '경기장에서 목소리를 높여 응원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부천의 살아있는 화석 양원석에게 서포팅이란 훨씬 넓고 깊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스탠드 위에 서는 것만이 아니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가던 대한민국 축구의 '뿌리'를 지켜내는 일이기도 했다.

1. 1995년 1월, 아무도 켜지 않던 필름 리더기 앞에서

1995년 1월, 2002년 월드컵 유치 열기가 한창이던 시절, 소설가 고원정 선생으로부터 한 통의 연락이 왔다. MBC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상 첫 A매치(1948년 런던 올림픽 멕시코전) 대본에 들어갈 정확한 자료를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양원석은 곧바로 대한축구협회에 연락했다. 하지만 정작 그 역사를 지켜야 할 협회조차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심지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협회가 보유한 자료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1950~60년대 기록은 아래한글 파일에 상대팀과 스코어만 달랑 적혀 있었고, 스쿼드나 경기장 이름조차 빠진 경우가 허다했다. 정리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 생각조차 없던, 그런 무관심의 시절이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양원석은 그 길로 정독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마이크로필름 보관실로 매일 출근하기 시작했다. 1969년 일간스포츠 창간 이전의 자료들은 지면 아카이빙조차 되어 있지 않아, 손으로 직접 뒤지는 것 외에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당시 전자식 리더기는 복사할 때만 겨우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손으로 핸들을 돌려가며 한 컷 한 컷 찾아야 하는 구식 수동 리더기 앞에 앉아, 빛바랜 필름 속 신문 기사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어 나갔다. "어느 필름 몇 번째 컷"인지를 메모지에 적어두었다가, 다시 그 컷을 찾아가 복사를 뜨는 일의 반복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무명의 노동을, 그는 보름이 넘도록 어두운 보관실에서 릴을 돌리며 이어갔다. 그렇게 1968년 이전, 오류투성이였던 한국 축구의 역사가 한 컷 한 컷 바로잡혀 갔다.

2. 아무도 몰랐던 이름, "덜리치 햄릿"

그렇게 보름 동안 어둠 속을 오가며 찾아낸 답은 경이로웠다. 1948년 8월 2일, 대한민국이 멕시코를 5-3으로 꺾으며 사상 첫 A매치 승리를 거둔 그 역사적인 장소. 런던 외곽의 작고 아담한 구장, '덜리치 햄릿(Dulwich Hamlet)'이었다. 당시 관중은 6,500명이었다.

참고로 이보다 앞선 1948년 7월 6일, 대표팀은 홍콩과도 경기를 치른 바 있다. 하지만 당시 홍콩 측 선발팀은 완전한 홍콩 국가대표가 아닌, 홍콩 리그 소속 중국계 선수들로 구성된 선발팀(Hong Kong-Chinese XI) 성격이었다. 국제경기는 크게 양 팀이 모두 A대표팀인 'A매치'와, 어느 한쪽이 A대표팀이 아닌 'Other's Match'로 구분되는데, 이 기준에 따라 홍콩전은 FIFA 및 대한축구협회 기준으로 대표팀 통산 첫 국제경기(비공식 경기)로 분류될 뿐, 정식 A매치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멕시코전이야말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축구 사상 첫 '정식 A매치'로 남는다.

당시 런던 특파원을 보냈던 동아일보 기사 한구석, 경기 다음 날 실린 단 한 줄에 묻혀 있던 그 이름은 양원석의 집념 덕분에 비로소 세상에 다시 알려졌고, MBC 다큐멘터리를 통해 시청자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만약 그가 필름을 손으로 돌려가며 그 한 줄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한국 축구의 위대한 출발점이었던 그 장소는 지금까지도 이름 없이 어딘가에 붕 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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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K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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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어지는 손: 동남아 서고를 뒤진 윤형진의 집념

이야기는 양원석 한 사람에서 끝나지 않았다. 훗날 축구 관련 회사에 다니던 지인이 대한축구협회로부터 경기 아카이브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이 일을 가장 잘 아는 양원석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그리고 양원석은 이 뜻깊은 과업을, 자신의 절친한 후배이자 동료였던 윤형진에게 조용히 넘겨주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윤형진 역시 축구에 대한 열정과 집념 하나로 몸을 던졌다. 그는 2007년 8월, 약 3주의 일정으로 협회의 지원을 받아 홍콩·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6개국의 현지 도서관들을 직접 찾아가, 먼지가 켜켜이 쌓인 당시 신문 지면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뒤졌다.

그 결실은 실로 위대했다. 그해 발굴한 A매치만 80여 경기.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던 경기들이 그의 손끝에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고, 이후 2016~2017년 베트남·필리핀을 추가로 찾아 빈틈을 마저 메웠다. 대한축구협회는 이 기록을 2018년 최종 정리해 FIFA에 공식 제출, 인증을 받았다. 그렇게 빈칸이 채워진 덕분에 차범근 감독의 A매치 100경기 출전(센추리 클럽) 입증과 최순호의 센추리 클럽 재편입이라는 역사적 순간이 비로소 정당하게 빛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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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경향신문]

4.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뿌리를 지키기 위해"

이 빛나는 성과들은 훗날 언론이나 공식 문서에서 정작 실무자들의 이름 대신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섭섭해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양원석과 윤형진이 그 고된 작업을 해낸 이유는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

"한국 축구가 그렇게 뿌리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거 찾는다는 사명감과 애정으로 했던 작업이었으니까요."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한국 바둑조차 초창기 입단대회 기록이 통째로 사라져 안타까워했던 것처럼, 자신들이 사랑하는 한국 축구만큼은 역사 속으로 잊혀지게 둘 수 없다는 그 뜨거운 사명감.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5. 우리가 그들을 '진정한 서포터'라 부르는 이유

오늘날 우리가 손쉽게 검색하고 확인하는 한국 축구 A매치의 정교한 기록들, 그 뒤에는 30년 전 어두운 도서관 구석에서 눈을 비벼가며 필름 릴을 돌리던 양원석의 손과, 타국의 먼지 쌓인 서고를 뒤지며 사라진 경기를 찾아 헤매던 윤형진의 땀이 조용히 묻어 있다.

1편의 양원석이 스탠드에서 30년 넘게 몸으로 뛴 서포터였다면, 이 기록 속의 양원석과 윤형진은 도서관 서고에서 필름을 돌리고 신문을 뒤지며 또 다른 방식으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쉼 없이 뛰었던 서포터들이었다.

스탠드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르는 일과, 잊혀질 뻔한 역사를 되찾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일. 언뜻 보면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마음은 결국 하나였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이름은 기록 뒤편으로 밀려났을지라도, 그들이 되찾아낸 역사는 영원히 남는다. 그 역사를 손수 바로잡아낸 '살아있는 화석'과, 묵묵히 그 뜻을 함께한 이는, 오늘도 변함없이 한국 축구를 향한 가장 뜨거운 자리에 서 있다.

저자 : 양원석  ·  카툰 : 고오오올인!

● 출처 — 1차 자료 및 언론 보도

[1]DFB Datencenter — Mexico vs South Korea, 1948 London Olympics

독일축구협회 공식 데이터센터 · 경기 기록 원본

[2]조선일보 — 고원정 작가 관련 기사

1997.11.17

[3]MBC뉴스데스크 — 고원정 작가 인터뷰

MBC 다큐멘터리 관련 리플레이

[4]동아일보 — "차범근의 잃어버린 A매치 출전 찾아낸 '기록 사냥꾼'"

2017.01.14

[5]스포츠경향 — "센추리클럽 찾아낸 기록 지킴이 윤형진씨…'13년 전 노력이 통했죠'"

2020.08.08

[6]경향신문 — "한국 축구 A매치 역사, 제대로 정리하고 싶다" (송기룡 인터뷰)

2025.01.13

● 관련글 — 부천 서포터즈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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