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은 떠났어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Bucheon Never Die)."

2006.02.02 — 연고 이전 발표 2025.12.08 — K리그1 승격

01 야반도주와 비극의 시작 — 2006년 2월 2일

2006년 2월 2일, 부천 팬들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전날에는 구단 관계자와 서포터가 만나 "올 시즌 잘 해보자"는 대화를 나눴고, 당일에는 서포터 홈페이지 리뉴얼 업체 방문 약속까지 잡혀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오전, 부천SK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는 단 몇 줄의 공지가 올라왔다. 연고지를 경기도 부천에서 제주도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통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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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심정에 부천 팬들은 그날 저녁 6시 30분, 약속도 없이 서포터 사무실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특별한 대책을 논의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이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부천팬 동료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한숨과 담배 연기만 피어오르던 그 자리에, 한 원로 서포터가 찾아와 "이미 끝났다"는 냉정한 말을 남기고 돌아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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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를 당하면 다음 날부터 통증이 밀려오듯, 하루가 지나자 분노와 아픔이 담긴 글들이 서포터 게시판을 가득 채웠다. 당시 부천 서포터 비상대책위원회의 성명서와 행동강령은 이렇게 적었다.

"지난 2004년 2월 2일. 안양 축구 팬들은 안양시의 자랑이었던 안양LG 치타스 축구팀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인 2006년 2월 2일. 부천 시민들과 부천을 사랑하는 모든 축구 팬 그리고 부천 서포터스는 부천SK 라는 축구팀을 잃었습니다."

02 절망을 딛고 일으켜 세운 투쟁의 나날들

부천 팬들은 분노만 표출하고 있지 않았다. 곧바로 부천시청 민원, 각종 커뮤니티와 언론 제보 등 행동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K리그와 내셔널리그 서포터까지 아우른 '연고이전 반대 비상대책위원회'의 이름으로, 붉은악마도 함께한 초유의 연대로 확대됐다.

  • 2.8 비대위·붉은악마·프로축구 서포터즈 연합 공동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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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 붉은악마 의장 오중권, 헤르메스 정해춘 등 대표단이 홍건표 부천시장 면담. 부천 서포터 발표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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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4 대한축구협회·SK 본사 앞 항의 집회. 궂은 날씨 속에도 150여 명 참석, 14개 항목 공개 질의서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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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9 손학규 경기도지사, 김문수 국회의원 등 지역 정치권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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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 연합뉴스·SBS·오마이뉴스 인터뷰.

2월 14일 대한축구협회 앞에는 謹弔(근조), 廢倫(폐륜) 같은 단어가 적힌 팻말이 등장했다. 안양REDS 김정현 회장은 2004년 안양LG 치타스의 서울 이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며, 이번엔 서로 적이었던 서포터즈들이 뭉쳐야 한다고 말했다. 한 부천 팬은 "8년을 미친놈 취급당하면서 부천에 대한 열정으로 원정까지 다녔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며 울먹였다.

성명서에는 SK 제품 불매 운동, 초상권 침해와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 청구 검토, 연고지를 잃은 지역 신생 구단의 가맹비·발전기금 면제 요구, 연고지 이전을 막을 제도적 장치 마련 요구까지 담겨 있었다. 동시에 "장기적인 보이콧은 회원 모두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고민도 함께 적혀 있었다. 그래서 택한 방식은, 정상적인 서포팅은 계속하되 그 안에 항의의 메시지를 응축해 담는 것이었다.

03 상처 속에서 피어난 붉은 불꽃 — 앙골라전 퍼포먼스

2006년 3월 1일, 상암월드컵경기장. 한국과 앙골라의 평가전이 열린 이 날,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성지였던 경기장은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붉은악마는 부천SK의 제주 연고이전에 항의하는 뜻으로 검은 옷을 입고 등장했고, 미처 검은 옷을 준비하지 못한 회원들에게는 검은 비닐을 나눠주며 시위 동참을 권했다. 골대 뒤편에 자리 잡은 붉은악마 수천 명은 오후 7시부터 북소리에 맞춰 '연고 이전 결사 반대'를 외쳤다.

여기에 부천 서포터들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 더해졌다. 찢겨진 유니폼 통천, SK와 연맹에 X표가 그어진 리사이클 통천, "Bucheon Never Die"라는 메인 걸개. 국가대표 경기라는 전 국민의 무대를 빌려, "우리는 부천이라는 이름의 축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알린 것이다.

(당시 부천서포터즈가 보유했던 초대형 유니폼 통천을 찢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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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눈물로 지은 우리의 집 — 부천FC 1995의 탄생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팬들은 이미 창단 준비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부천 서포터 대표가 작성한 발표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한국 최초의 서포터인 부천 서포터는 다시 한국 최고의 축구리그인 K리그에서 응원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말처럼 쉬운 길은 아니었다. 창단 대행 업체를 선정했지만 부천시의 소극적 태도와 후원 기업 부재로 순조롭지 못했고, 이후 꾸린 TF마저 흐지부지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다 대한축구협회가 K3리그를 새로 만든다는 소식이 가뭄의 단비처럼 찾아왔다. 팀 창단에 필요한 자금은 팬들의 십시일반 기부와 노동으로 채워졌다.

2007년 12월 1일 14시 30분, 부천시청 대강당에서 마침내 창단식이 열렸다. 기업이나 지자체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팬들의 자발적인 모금과 서명, 부천 시민들의 염원이 모여 만든 구단이었다. 2008년 3월 22일, 경주시민구단을 상대로 한 첫 경기는 비속에서 치러졌다. 잃어버린 우리 팀의 경기를 다시 본다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05 팬이 만든 구단, 팬이 지킨 구단

창단 이후가 더 힘든 싸움이었다. 상주 직원은 단 한 명뿐이었고, TF 구성원들을 포함한 모든 운영진은 무급으로 일했다. 팬들은 매주 사업자에게 후원 제안서를 제출하고, 자비를 들여 스폰서에게 성과를 보고했다. A보드 구매 비용을 아끼려고 팬이 직접 파이프를 조달해 용접했고, 경기 전에는 벤치와 코너 플랙, 골대 그물을 팬들이 직접 설치했다가 경기 후 철수까지 도맡았다. 티켓을 팔아야 할 사람이 없으면 일부 팬은 관전을 포기하고 매표소에 섰다. 구단 재정에 위기가 올 때마다 미국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부쳐온 팬도 있었다.

2008년, 연고이전에 함께 아파했던 잉글랜드의 AFC 윔블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자매결연을 맺었다. 2009년에는 SKT 소원 프로모션에 선정되어, 같은 아픔을 겪은 FC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와의 친선전을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치렀다. 비가 내렸는데도 2만 3,320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2012년 K리그 2부리그 진출을 위한 부천시의회 조례안은 재적의원 28명 중 찬성 14, 기권 14로 한 차례 부결됐다. 팬들은 다시 모금에 나섰고, 구단 관계자들은 시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설득했다. 12월 5일, 조례안은 결국 통과됐다. 연고이전 후 8년 만에, 부천에 프로축구가 돌아왔다.

2025년 12월 8일. 팀을 잃고 눈물 흘린 지, 정확히 20년.
부천FC 1995, K리그1으로 돌아오다.

06 2026년,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시민구단' — 그리고 부천이 걸어온 다른 길

2026년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 이후, 홍명보 감독과 정몽규 축구협회장이 물러나면서 그 여파는 지자체 예산으로 운영되는 K리그 시민구단들에까지 번졌다. 나라살림연구소 집계로 2026년 K리그1·2 시·도민구단에 지원된 지자체 예산은 1,511억 원. K리그1·2 26개 구단 중 60%인 16개 구단이 시민구단이며 예산 대부분을 세금에 의존한다는 점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시민단체는 월드컵 기간 멕시코 캉쿤 체류 등 외유성 해외 출장을 다녀온 시·도민구단 대표 9명을 업무상 배임·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특히 수원FC는 같은 지역에 K리그 최고 인기 구단인 수원삼성이 이미 있는데도 세금으로 프로화를 강행했다는 점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사례로 꼽혔다.

이 비판의 핵심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많은 시민구단은 지자체가 "우리 도시도 프로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행정적 판단으로 위에서 아래로 만든 조직이다. 예산이 먼저 편성되고, 팬은 그다음에 모아야 하는 순서였다.

부천FC 1995는 정반대의 순서를 밟았다. 시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팀을 빼앗긴 팬들이 학업과 직장을 포기해가며 스스로 만든 팀이었다. 창단 초기 몇 년간 구단을 움직인 것은 세금이 아니라 무급으로 뛴 운영진, 손수 용접한 A보드, 팬이 직접 판 입장권, 위기 때마다 사비를 부친 팬들의 성의였다. 시로부터 연간 7,500만 원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것도 창단으로부터 3년이 더 지난 2011년의 일이다. 지금의 부천FC 1995도 프로화 이후에는 다른 시민구단들처럼 지자체 예산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그 뿌리는 세금이 아니라 팬들의 눈물과 자원봉사로 다져졌다는 점에서, 오늘날 반복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부천만큼은 이미 스무 해 전에 스스로 답을 내놓은 구단이다.

Bucheon Never Die — since 1995

+ 참고 자료

○BucheonFC.net 우리의 역사 — 부천 FC 1995 서포터 헤르메스 열기 스포츠경향 · 2006.03.01 [현장메모]

"연고이전 반대" 검은 옷 물결 열기 오마이스타 · 2006.02.15 프로축구서포터즈연합, 축구협회-SK본사 앞 항의 집회 열기

Tistory · walk around 부천SK 연고지이전 후 준비한 성명서 및 축구팬 제안

위키백과 부천 FC 1995 열기 위키백과 부천FC 헤르메스 서포터즈 열기 뉴스톱 · 팩트체크 2026 시민구단의 불편한 진실? 열기 서울경제 · 2026.08 '캉쿤 외유' 논란…시·도민구단 대표 9명 고발 열기 매일신문 · 2026.07 네티즌들에게 아닌 밤중에 얻어맞은 시민구단 열기

○ 사진 제공 : 양원석님

부천 FC 1995 서포터 헤르메스 — 역사 아카이브 · history.bucheonf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