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하는 사람에서 팀을 만드는 사람, "김도영"
Prologue —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
경기가 없는 날의 그는 좀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이었다. 후배들 사이를 누비며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누군가 정색을 하면 오히려 더 짓궂게 웃어 보이는 남자. 그런데 킥오프 휘슬이 울리고 첫 응원가의 전주가 시작되는 순간 — 그 얼굴은 마치 스위치가 꺼지듯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에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누구보다 뜨거운 눈빛을 가진 한 사람이 선다.
이 두 얼굴 사이의 틈, 그 좁고 깊은 틈 속에 30년의 시간이 웅크리고 있다. 빼앗기고, 부서지고, 그럼에도 끝내 지워지지 않은 시간. 그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사업가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팀을 위해 목소리 하나를 보태고 싶었던, 스탠드에 서 있던 수많은 얼굴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는 문화가 되었고, 문화는 훗날 폐허 속에서 팀 하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그 이름, 김도영이다.

1. 문화의 뿌리 — 전화동아리방에서 시작된 네트워크
김도영의 축구 인생은 화려한 조명 아래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 시작점은 이제는 아련한 유물이 된 '전화동아리방'이었다.
1990년대 중반, PC통신은 결코 대중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하이텔·유니텔 등 PC통신 서비스는 정액 이용료 외에도 전화 접속 시간에 따라 부과되는 통신 요금 부담이 상당했다. 집에 컴퓨터조차 없던 학생 신분의 김도영에게 온라인 접속은 넘기 힘든 벽이었다.
그 현실적 장벽 속에서 찾아낸 대안이 다이얼 하나로 접속하는 음성 기반 서비스, '전화동아리방(ARS)'이었다. 1996년 10월, 부천 유공은 국내 프로축구 구단 최초로 팬들에게 구단과 선수 소식을 전하는 동아리전화 서비스를 개설했다. 김도영은 서비스 번호와 비밀번호를 눌러 접속하는 이 작은 음성 공간을 직접 관리하고 활성화하며 초기 부천 서포터들의 네트워크를 지탱했다.

그의 발자국은 부천에만 머물지 않았다. 초기 한국 국가대표 축구 서포터즈의 모태가 된 붉은악마 전화동아리방(02-153-337-2002) 역시 운영자 황준하와 함께 부운영자로 활약하며 전화선 너머 서포터간 소통 채널을 구축해 나갔다.
이 음성 공간과 스탠드를 오가며 쏟아 부은 열정은 초기 축구 팬덤 안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각인되었다. 1997년 9월 28일, 대한민국 축구사가 선명히 기억하는 도쿄 원정 2:1 승리(도쿄대첩) 직후의 일이다. 미처 일본으로 가지 못한 붉은악마 회원 135명이 서울 명륜동 호프집에 모여 자축 파티를 벌였을 때, 그들은 현장에서 "한국 축구를 가장 사랑하는 인물"로 당시 21세 대학생이었던 김도영을 선정하고 '붉은악마의 마스코트'로 삼았다. 이 에피소드는 다음 날인 1997년 9월 29일 자 일간지 사회면에 보도되며, 그가 한국 축구 서포터 1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임을 공식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1997년9월29일 일간스포츠 46판 사회면 기사]
나아가 그는 1998년 붉은악마에서 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공식 응원가 CD 《Red Devil - We all will be there for you》 작업에도 코러스 및 스태프로 직접 참여하며 스탠드의 함성을 기록된 문화로 바꾸는 첫 발자국을 함께 이끌었다.
한국통신 단말기를 빌리고 타인의 아이디를 빌려 쓰며 어렵사리 온라인에 발을 걸쳤던 청년. 전화동아리방을 통해 축구에 목마른 이들의 목소리를 모아내고 붉은악마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던 그의 집념은, 가진 것 없이도 사람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 보이며 훗날 스탠드 전체를 뒤흔드는 응원 문화의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2. 문화의 건축가 — 응원을 '역사'로 축적하다
2-1. 스탠드의 아키텍처
부천의 스탠드에서 김도영과 서포터즈 헤르메스(Hermes)는 관람객이 아니었다. 그들은 텅 빈 콘크리트 계단 위에, 아무도 걸어본 적 없는 길을 한 걸음씩 새겨 넣은 건축가였다.
그들이 만들고 부른 노래들은, 부르는 순간 곧 스탠드의 언어가 되었다.
「!!!부천」(1997)
「나의 부천 영원히」(1997) — 붉은악마 "필승코리아" 음원 사용(강모씨과의 공동 제안)
「Attack Bucheon」/「Enjoy Bucheon」(1998)
「올레 올레 올~레 오 부천」(1998, 김도영 제안)
「Reds Soul Bucheon」(2001)/「부천 LaLaLaLa」(2005) 등
한편 비슷한 시기, 헤르메스 내부에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이병국이 1997년 도쿄 원정에서 목격한 일본식 응원의 한계를 문제 삼으며 '울트라스(Ultras)'라는 철학적 개념을 제안했고, 이는 「Ale Forza Bucheon」·YNWA 같은 응원가와 게이트기·대형 플래카드라는 시각적 장치로 이어졌다. 김도영이 조직과 기록, 실행의 축을 담당했다면, 이병국은 그 정체성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이론적으로 제시한 쪽이었다. 두 흐름은 대립이 아니라 병행이었고, 이 둘이 만나며 헤르메스는 '노래하는 응원단'에서 '스탠드의 주체'로 도약할 수 있었다.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이병국이 제안한 'ULTRAS' 정체성은 김도영의 손을 거쳐 실제 대형 걸개와 레터링으로 구현되었다. 82미터짜리 대형 걸개의 밑그림을 손수 그렸고, 밤을 새워 천을 자르고 페인트를 칠했다. ULTRAS BUCHEON이라는 여덟 글자, 그 레터링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몇 번이고 붓을 다시 들었을 그 손끝에서, 개념은 비로소 눈에 보이는 색깔이 되었다. 스탠드는 더는 관중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손과 생각이 모여 세운 하나의 무대였다.
2-2. K리그의 지형을 바꾼 '최초'의 기록들
김도영과 헤르메스가 남긴 발자국은 곧 한국 응원 문화의 이정표가 되었다.
초대형 유니폼 통천(Tifo) 및 82m급 메인 걸개: 당대 최대 길이의 걸개는 관람석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바꿔놓았다.


국내 클럽 최초 공식 응원가 CD 발매: 부르는 순간 흩어져 사라질 함성을, 손에 쥘 수 있는 기록으로 남겼다.

콜리더(Caller) 전승 시스템: 한 세대의 목소리가 다음 세대로 끊기지 않게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지금도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등번호 12번 영구결번(1998년): 부천 SK가 헤르메스에게 바친 이 결번은, 한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팬을 '클럽의 12번째 선수'로 인정한 사건이었다.
그날, 관중석의 한 사람이 마침내 팀의 일부로 새겨졌다. 그 자리에 김도영이 있었다.
3. 검은 옷의 저항 — 연고 이전과 '부천축구 장례식'
2006년 2월 2일. 겨울이 채 끝나지 않은 그 하루, 부천 SK의 제주 연고 이전이 발표됐다. 부천시도 몰랐고, 팬들도 몰랐다. 10년 넘게 스탠드를 지켜온 역사가, 단 하루 만에 종잇조각처럼 구겨져 버렸다.
전화를 받은 김도영은, 아마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래 주저앉아 있지 않았다. 당시 헤르메스 회장이었던 그는 서포터들과 함께 검은 옷을 꺼내 입고 거리로 나섰다. 서울 서린동 SK 본사 앞, 대한축구협회 앞을 메운 검은 물결. 그들의 손엔 영정 사진이 들려 있었다. 살아있는 팀의 영정을 든다는 것 — 그것은 사랑하던 것을 잃는 슬픔을,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시 헤르메스의 원로 한 사람은 이미 끝났다는 망언을 하고 갈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고, 모두가 다시는 부천에 축구팀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이 없었던 시기에 그는 투쟁을 결정한 것이다.

이 저항은 부천의 경계를 넘어섰다. 2006년 3월 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앙골라전. 붉은악마와 K리그 서포터즈 연합은 검은 옷을 입고, 전반전 초반 내내 응원 대신 침묵을 택했다. 몇만 명이 모인 경기장에 잠시 내려앉은 그 정적은, 한 지역 클럽의 비극이 이제는 대한민국 축구팬 전체가 함께 짊어지는 아픔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부천 시민의 호응이 없어서 떠난다고? 그것은 팬들과 지역 사회에 대한 비열한 망발이다."
언론 앞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분노가 아니었다. "팀은 빼앗길지언정, 우리의 축구와 정통성은 죽지 않는다"는 다짐이었고, 폐허 위에서도 다시 걷겠다는, 아주 조용하고 단단한 결심이었다.

4. 폐허 위에 세운 기적 — 정통성을 지켜낸 헤르메스의 중심
팀이 사라지면 서포터즈도 함께 사라진다 — 그것이 오랜 관례였다. 헤르메스는 그 공식을 깨뜨렸다. 도리어 방향의 전환을 했다.
팀이 사라지면 팀을 만들자.
2006년 3월, 그는 서포터즈 원로들을 설득하고 '부천FC 창단시민모임'이 발족했다. 처음엔 내셔널리그를 바라봤지만, 2007년 K3리그가 열리며 방향을 틀었다. 2007년 11월 부천시와 연고지 협약을 맺고, 그해 12월 1일 마침내 '부천FC 1995'의 창단식이 열렸다. 그 모든 여정의 한가운데, 김도영은 당시 헤르메스 회장으로서 흔들리는 조직의 중심을 붙잡고 있었다. 팀도, 연고지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서, 서포터즈의 조직을 그는 다시 처음부터 걸었다.
그 정통성을 세상에 증명한 상징적인 하루가 2008년 12월 26일, '부천FC-OB 자선경기'였다. 부천실내체육관 야외구장. 이을용, 윤정환, 김한윤, 남기일, 곽경근 — 한때 부천 SK의 이름을 달고 뛰었던 옛 선수 30여 명이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팀은 사라졌어도 부천의 맥은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증명하러 온 자리였다. 유니폼도, 팀 이름도 없이 서포터 몇몇이 지켜낸 자리에, 한때 그 유니폼을 입었던 사람들이 돌아와 준 것이었다.
부천FC 1995가 이을용, 윤정환 등 과거 부천SK의 영웅들과 함께 뜻깊은 송년 자선경기를 개최합니다.
https://m.joynews24.com/v/382372
K3리그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 K리그2를 거쳐 승격까지 부천FC 1995. 그 모든 여정의 맨 밑바닥에는, 화려함 대신 스탠드의 야성을 끝까지 지킨 김도영과 헤르메스의 이야기가 뿌리처럼 박혀 있다.
Epilogue — 다시, 스탠드의 한 사람으로
전화선 너머의 목소리를 모으던 청년, 스탠드의 문화를 설계한 건축가, 검은 옷을 입고 연고 이전에 맞선 투사, 그리고 사라진 팀을 시민의 손으로 다시 세운 주역.
30년의 궤적은 결국 짧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응원 → 문화 → 저항 → 창단"
수많은 이름을 뒤로하고, 그는 오늘도 다시 스탠드의 한 구석으로 돌아온다. 지난 서포터즈를 이끌던 회장도 아니고, 창단 주역도 아니다. 그저 땀 냄새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목이 터져라 부천을 외치는 '한 명의 서포터'로.
그를 아는 이들은 말한다. 회의 석상에서는 날카로운 원칙론자였지만, 경기가 끝난 뒤 계단에 걸터앉아 후배들과 농담을 나누던 모습은 영락없는 개구쟁이 소년이었다고. 어쩌면 그 철들지 않은 마음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에, 그는 삼십 년을 지치지 않고 스탠드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기업은 팀을 버릴 수 있어도, 팬은 축구를 버리지 않는다. 스탠드에 단 한 명의 목소리가 남아있는 한, 우리의 클럽은 결코 죽지 않는다."
항상 얘기하던 그의 이 철학은 구호로 끝나지 않았다. 오늘도, 부천FC 1995의 붉은 역사와 헤르메스의 함성 속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서포터 열전] 시리즈 · 부천 헤르메스 (Hermes) · 부천 서포터즈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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