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은 사라지지만, 기록은 영원이 된다.
축구 경기장의 90분이 지나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면, 스탠드를 가득 메웠던 서포터들의 목소리는 공중으로 아득히 흩어진다. 그러나 그 순간이 한 줌의 공기로 사라지게 두지 않고, 손끝으로 하나하나 주워 담아 구단의 영혼으로 되살려내는 사람이 있다.
부천 FC 1995 서포터즈 헤르메스의 서포터즈 아키비스트(Club Archivist), 김윤현. 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기억은 흐려지지만, 기록은 남아 역사가 된다.
역사를 잊은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그러나 역사를 기록하는 팬이 있는 한, 구단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2006년 연고 이전이라는 비극 속에서 팀을 빼앗겼을 때, 부천 팬들이 절망 속에서 깨달은 단 하나의 진실이 있었다. 우리에게 남은 진짜 구단은 오직 우리의 기억과 기록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상처와 절망을 딛고 일어선 부천 팬들 중, 김윤현은 조용히 손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부천 축구의 뿌리와 DNA를 찾아 나서는 30년의 집요한 여정을 걸어왔다.
1998년 잠실, 그리고 목동의 미소년
김윤현과 부천의 첫 만남은 1998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어린 소년은 잠실구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평가전을 보러 갔다가 이색적인 풍경을 목격한다. 붉은악마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당당히 부천SK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던 서포터들이었다.
부천SK가 목동운동장에서 경기를 한다고. 집에서도 가까우니 한 번 가볼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찾았던 목동경기장의 첫인상은 충격 그 자체였다.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고, 기대했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하고 돌아섰던 어린 소년. 그런데 그때 한 명의 선배가 있었다. 서포터즈 선배 이병국, 훗날 헤르메스에 울트라스 문화를 처음 가져온 개척자였던 그다. 그의 집요한 연락과 권유에 못 이겨 한 번, 두 번, 다시 경기장을 찾게 되었다. 그 나약했던 한 명의 소년의 반복된 발걸음이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부천을 지키는 운명이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사진내 수건용 머플러 : 김윤현]
당시 서포터즈 형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응원 일을 돕던 앳된 소년은, 경기장을 계속 찾으면서 자연스럽게 서포터즈의 문화를 온몸으로 익혀갔다. 형들을 돕고, 응원에 참여하고, 새로운 응원 방식을 함께 고민하면서 그의 역할은 조금씩 넓어졌다. 응원을 하는 사람에서 응원을 만드는 사람으로. 그리고 훗날, 응원을 만드는 사람에서 그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그 변화야말로 김윤현을 다른 여느 서포터와 구분 짓는 지점이었다.

[사진내 홍염을 들고 있는 김윤현]
아무 데도 없던 역사, 그래서 시작된 발굴
그가 더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부천 서포터즈의 역사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뿌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뒤져 봐도 초창기 인터넷에 있던 자료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기억마저 시간이 흐르며 흐릿해지거나 오류로 굳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개인의 주장이 자료가 되어 있었고, 오류로 얼룩진 기억이 정보로 둔갑해 있었다. 그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늦었더라도, 사료를 직접 찾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원로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그들의 증언을 하나하나 모아 서로 겹치는 지점을 찾아내며, 기억의 오류를 하나씩 걸러내는 작업을 이어갔다.
서포터즈 아키비스트로서 그의 일상은 집요함 그 자체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수십 년 전의 먼지 쌓인 신문 스크랩을 뒤졌고, 고서적 판매점과 중고 서점을 샅샅이 훑어 빛바랜 축구 잡지를 찾아냈다. 많은 이들이 불가능하다 말했던 것을 그는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의 발굴 작업은 단순한 자료 수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 축구 서포터 역사의 진실을 증명하는 작업이었다.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 시절의 초창기 게시글부터, 잊혀 있던 초기 헤르메스의 사진과 기록까지, 그는 하나하나 모으고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그 발굴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1995년 5월 20일자 스포츠조선 기사와, 1995년 5월 14일 신동일 님이 유공 구단 단장에게 보낸 공문이다. 이 자료들은 그동안 1995년을 창단의 해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이들의 논리를 정면으로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모두가 30년 전 자료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사료를, 그는 끝내 찾아냈다.
그뿐이 아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부천 축구의 변화를 담은 영상 자료, 많은 사람들이 존재만 알고 실제로는 볼 수 없다고 여겼던 그 필름을 찾기 위해 그는 방송국의 비디오 아카이브를 직접 찾아갔고, 필요하면 사비로 구매해 캡처했다. 팩트를 확인하기 위해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사들이고, 도서관을 수시로 오가며 낡은 축구 잡지와 스크랩을 발견할 때마다 손수 구입해 보존한 그 집념은, 이제는 거의 신념에 가깝다.


자료를 찾고, 서로 대조하고, 날짜를 확인하고, 당시 상황을 다시 구성하는 일. 20~30년 전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터넷 검색과는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는 역사라고 믿으며 저장하고 기록한다. 그의 손끝을 거치며 흩어져 있던 파편들은 하나의 도도한 역사로 흘러들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 그리고 스탠드의 목소리를 만든 사람
김윤현은 조용히 기록만 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두운 도서관 같은 공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스탠드 위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목소리를 낸 콜리더였고, 응원가를 만든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그 역사의 현장에 직접 서 있던 당사자였다.
2003시즌 개막 이후 구단 운영에 항의하기 위해 제작된 대형 걸개의 사진에는, 그 출처로 헤르메스 김윤현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이는 그가 훗날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이미 그 시절 현장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오늘날 헤르메스가 경기장 곳곳에서 부르는 굵직한 응원 콜과 노래 속에는, 그의 손길과 고민과 부천을 향한 사랑이 깊이 배어 있다. 2005년 제안한 「Shout for Bucheon」을 비롯해 「Jumping」, 「저 빛나는 별처럼」, 「우린 포기안해」가 모두 그의 제안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시온과 함께 제안한 「난 죽을 때까지 부천」도 있다. 「Ale Bucheon」, 그리고 2005년 김도영과 함께 다시 쓴 「오~ 나의 부천, 영원히 함께해」, 2013년 그가 제안하고 다듬은 「언제나 부천」에도 그의 수정과 손길이 남아 있다.
"언제나 부천"의 가사 속 스물 두 번 못 이겨도라는 구절은,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22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가리킨다. 구단이 어떤 암흑기에 있더라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는, 신앙고백과도 같은 가사였다.
30년 세월 동안 그는 펜을 들었다가 마이크를 들었다. 기록하는 손과 응원하는 목소리, 그리고 현장을 지켰던 두 발로 부천을 지켜왔다.
잊히기 전에 당신을 기록하겠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 시절의 부천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김윤현이 자료를 찾는 이유는 과거를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같은 사건도 다르게 기억한다. 10년 전의 기억과 20년 전의 기억은 달라지고, 30년이 지나면 날짜와 순서마저 뒤섞인다. 그래서 그는 묻고, 그 기억을 신문과 사진과 방송 자료에 하나하나 맞춰본다. 그렇게 흐려진 기억 하나를 다시 하나의 역사적 기록으로 바꾸어 놓는다.
1998년 봄, 목동 경기장에서 그 소년이 이제 30년의 세월을 묵묵히 걸어온 기록자가 되었다. 어린 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김윤현이 찾아낸 것은 단순한 종이 조각이나 낡은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다. 그것은 팀을 잃었던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선 부천 팬들의 자존심이며, 부천 FC 1995라는 구단의 가장 깊은 곳에 흐르는 DNA 그 자체다.
도서관의 먼지 속에서, 고서점의 낡은 책장에서, 방송국 아카이브의 어두운 서고 속에서 발굴해낸 자료 한 장 한 장. 그것은 이제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살아 숨 쉬는 부천 서포터즈의 역사이며, 영원한 증거이며,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다.
경기장의 함성은 휘슬 소리와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 그 순간의 목소리는 시간 속에 묻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지켜내는 김윤현이라는 한 명의 팬이 있는 한, 부천의 역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기록하는 자의 손끝에서, 30년의 함성은 비로소 불멸이 된다.
역사를 쓰는 것은 승리한 자가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남기려 한 자다.
그는 지금도 역사를 확인하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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