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erraces — 영국 축구에서 오랜 세월 사람들이 서서 응원하던 자리. 노래와 깃발과 함성으로, 팬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새겨 넣던 공간. (우리가 보통 사용했던 골대뒤의 Curva와는 약간의 의미 차이가 있다)
그 테라스 옆에 'Barrister'라는 이름을 나란히 세운 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법정에서 직접 변론하는 영국의 Barrister처럼, 경찰의 과잉 대응과 구단의 일방적 통제와 언론의 왜곡된 시선 앞에서 팬들의 자리를 지켜낸 사람이라는 뜻. 그리고 흩어진 목소리들을 하나로 모아, 법과 논리의 언어로 세상에 전하는 대변인이었다는 뜻의 의미를 부여함.
'Barrister of the Terraces' — 이 한 줄은, 그가 법정의 변호인으로만 머물지 않고 끝내 팬들의 편에 섰던 한 사람의 생애를 압축한다.
[2001년 8월 15일, 패배가 심어놓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
그의 축구를 보게된 동기의 시작은 창단도, 법정도 아니었다. 시작은 한 번의 참패였다.
2001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체코에 0대5로 무너졌다. 스코어보드에 찍힌 그 다섯 골은 단순한 패배의 숫자가 아니었다. 그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한 청년에게는, 이상하게도 그 참패가 이상한 사명감으로 바뀌어 마음에 내려앉았다.
'한국 축구를 살리는 길은 K리그에 직접 동참하는 것이다.'
그는 그날, 당시 헤르메스가 둥지를 틀고 있던 커뮤니티 사이트에 가입했다. 집이 인천이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팀이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더 크게 그를 끌어당긴 건 니폼니시 감독이 선보였던 '니포 축구'의 잔향이었다. 그 매력적인 플레이 앞에서, 어떤 팀을 응원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부천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이 곧장 경기장으로 향하지는 못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책상 앞에서 그는 텔레비전 중계로 부천SK의 경기를 찾아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화면 속 그라운드가, 그가 축구라는 곳에 닿을 수 있는 전부였던 시절이다.
그리고 2002년, 사법시험 2차 시험이 끝났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 날, 튀르키예와의 3·4위전이 열리며 한일월드컵의 열기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온 나라가 경기장으로 몰려가던 그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도 마침내 그 흐름에 이끌려 부천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시험을 마치고 비로소 손에 쥔 시간을, 그는 지금의 아내인 당시 여자친구와 함께 그 경기장에서 보냈다. 그해 시즌이 끝난 뒤, 그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중앙: 김형찬님)
패배를 목격한 자리에서 싹튼 사명감이, 한 사람을 그라운드 밖에서 팀을 지키는 사람으로 빚어내기까지 — 그 여정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꿈]
2006년 2월, 연고팀은 하루아침에 제주로 떠났다. 부천에 남은 건 팀도, 선수도, 자본도, 선례도 아닌 사람들뿐이었다. 그 텅 빈 자리에서 부천의 서포터들은 무모해 보이는 꿈을 꾸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오직 팬들의 힘만으로 팀을 다시 세우겠다는 꿈이었다.
그 꿈을 비웃는 이는 많았지만 그 꿈을 동승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실제로 밀어붙인 이들은, 평일이면 저마다의 생업으로 돌아가고 주말이면 다시 돌아와 시간을 쪼개던 사람들, 다름 아닌 부천의 서포터들 자신이었다. 돈을 받는 전문 인력도, 고용된 상근 직원도 없었다. 오직 팀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모인 이들이 서류를 쓰고, 협상 테이블에 앉고, 밤을 새워가며 불가능을 하나씩 가능으로 바꾸어갔다.
그 대열 속에는, 6년 전 체코전 참패를 보며 사명감을 품었던 그 청년의 새로운 꿈이 된 것이다.
그리고 2007년, 그 밤들은 마침내 부천FC 1995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팬들이 팀을 잃은 자리에서, 팬들이 다시 팀을 만들어낸 이야기. 부천FC 1995의 역사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름칠을 하던 사람]
자원봉사자들만으로 굴러가는 조직에 마찰이 없었을 리 없다. 사람이 모이는 곳엔 오해가 자라고, 사소한 갈등이 부풀려져 법적 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 서포터 문화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창단에서 승격까지, 이 길고 험한 여정이 큰 사고 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음새마다 삐걱거릴 수 있었던 그 모든 순간, 아무도 모르게 기름을 치며 마찰을 줄여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
김형찬 변호사였다.
그는 앞에 나서 이름을 알리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에 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문제가 커지기 전에 매듭을 지었다. 이름을 남기기 위한 일도, 거액의 수임료가 걸린 일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누군가의 부탁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상황을 살폈다. 자원봉사자들이 밤새 쌓아 올린 것들이 사소한 법적 실수 하나로 무너지지 않도록, 그는 늘 한발 앞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팬들이 만든 클럽, 그 뒤를 지킨 법률가]
부천FC 창단의 법적 실무는 겉보기보다 훨씬 복잡했다. 창단 당시에는 팀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으려는 세력이 창단 TF에 접수를 시도한 일이 있었고, 부천시와의 연고지 협약 역시 대표성을 둘러싼 문제 제기로 좀처럼 성사되지 못하다가 11월 1일에야 겨우 체결되었다. 이후 2010년 초 발기인을 구성하고, 그해 12월 법인 등기를 마쳤으며, 2011년 2월 27일 첫 주주총회를 거쳐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비로소 시민구단으로서의 법적 틀을 갖춰갈 수 있었다.
등록 서류, 연맹 제출 서류, 자산을 둘러싼 문제, 스폰서 표준계약서까지 — 경기장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법률적 절차와 판단이 그 이면에 있었다.
김형찬은 그 과정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미처 보지 못한 문제를 하나씩 짚어냈다. 서류 한 장을 검토하고, 계약의 위험 요소를 확인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필요한 법적 절차를 설명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였을 그 일들이 모여, 팬들이 만든 팀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창단이라는 결승선까지, 팬들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뒤에서 묵묵히 길을 닦았다.
[자본도, 법무팀도 없었던 시절]
그가 상대해야 했던 것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리그 참가와 승격 과정마다 각종 심사와 조건을 요구했고, 2012년 2부 리그 승격 신청 당시에도 연맹 이사회는 부천시의회의 지원 조례안 통과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부천시의회는 그 조례안을 한 차례 부결시켰다가, 재상정 끝에 가까스로 통과시켰다.
리그의 다른 팀들 가운데는 이미 대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를 등에 업고 전문 행정·법무 인력을 갖춘 구단들이 있었다. 부천FC는 달랐다. 상근 법무팀도, 거대한 조직도 없었다. 팬들의 자원봉사와 헌신만이 이 팀을 앞으로 밀어가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그런 부천FC에게, 변호사 김형찬이 자신의 시간과 전문성을 나눈 것은 결코 작은 지원이 아니었다. 그는 매 사안마다 진행 과정을 살피고,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먼저 짚은 뒤, 팀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 곁을 지켰다.
승소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원한 꿈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부천FC가 다음 시즌에도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법률가이면서 동시에 서포터]
당시 부천FC의 사정은 넉넉하지 않았다. 유일한 상주 직원 한 명조차 열정 페이라는 명목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김형찬은 변호사였지만, 동시에 경기 당일이면 자원봉사와 서포팅에 함께하던 서포터이기도 했다. 체코전 패배를 보며 K리그행을 결심했던 그 마음, 연애 시절 여자친구와 손잡고 부천종합운동장을 찾던 그 마음은, 변호사 배지를 단 뒤에도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평일에는 법률사무소에서 의뢰인의 서류를 검토하고, 주말이면 경기장 한켠에서 유니폼을 입고 부천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법률가의 언어와 서포터의 마음. 이 둘을 한 사람이 동시에 품고 있었다. 팀이 그저 맥박만이라도 유지하기를 바라던 시절, 그는 자신이 가진 전문성과 애정을 모두 부천FC에 내놓았다.

(윗줄 왼쪽 3번째 : 김형찬님)
[지금, 그리고 남은 것]
시간이 흘러 부천FC 1995는 하위리그와 2부를 거쳐 마침내 1부 무대에 섰다. 자원봉사자들이 세우고 지켜온 팀이, 수많은 고비를 지나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된 것 — 그 자체가 그가 조용히 쌓아 올린 가장 단단한 자산일지도 모른다.
트로피도, 골도, 승격의 순간에 터진 함성도 그의 이름과 함께 기록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였다는 사실만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김형찬 변호사는 지금도 부천FC 1995의 감사로서 법률 자문과 감사 업무, 상벌위원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아카이브팀에서 부천FC의 역사 기록을 지키며, 그 기록에 얽힌 법률적 해석과 자문을 함께 맡고 있다. 창단 초기 서류를 검토하던 법률가가, 이제는 부천FC의 역사를 지키는 파수꾼이 된 것이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이렇게 돌아본다. 본업을 하면서 경기 당일 자원봉사와 서포팅을 하고, 그저 팀의 맥박이 유지되기만을 바랐던 사람이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마치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그 말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체코전 0대5의 밤으로부터 시작된 한 사람의 여정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던 불모지에서 대가도 갈채도 없이 서류를 검토하고 문제를 막아내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지켜낸 팀이 당당히 살아 숨 쉬는 모습을 두 눈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가 처음 헤르메스 사이트에 가입하던 그날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풍경이다.
[골대뒤 "테라스"의 목소리 뒤에는]
영국 축구에서 Terraces는 단순히 사람들이 경기를 바라보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팬들이 자신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만들어온 상징적인 자리였다. 그곳에서 팬들은 노래했고, 깃발을 흔들었고, 자신들의 팀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세상은 스탠드와 테라스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법과 제도의 벽에 부딪혀 꺾이지 않도록, 아무도 모르게 방패를 쥐어준 사람들의 존재 또한 기억해야 한다.
부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헤르메스의 응원 공간이 골대 뒤의 Curva로 불렸든, 그것을 보다 넓은 의미에서 Terraces라 부르든,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였다. 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김형찬 변호사는, 바로 그 목소리가 계속 울릴 수 있도록 뒤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내놓은 사람이었다.
부천의 테라스에, 그리고 그 뒤편에서 묵묵히 움직였던 자원봉사자들의 대열 속에 그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마주한 이 이야기는 어쩌면 아주 다른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트로피를 들어 올린 사람도, 승격의 순간 가장 앞에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팬들이 만든 팀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 — 그것이 김형찬이라는 이름이 부천FC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제는 우리가 대신 기억해야 할 차례다.
"법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약자의 방패가 되어야 한다.
부천FC는 팬들이 세운 클럽이다. 그 팬들을 지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인물 프로필]
성명: 김형찬
사법연수원: 34기
사법시험: 제44회 합격
사법연수원 수료: 2005년
경력: 공익법무관(2005~2008년) → 법무법인 로시스 구성원 변호사(2008~2010년) → 대한법률구조공단 소속 변호사(2010~2017년)
현재 소속: 법률사무소 HC 대표변호사
현재 활동: 부천FC 1995 감사, 부천FC1995 아카이브팀 등
홈페이지: lawyerhc.co.kr
댓글 0
댓글 작성은 로그인 · 가입 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