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텅 빈 응원석에 가장 먼저 서준 사람
"우리의 경기는 최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카포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경기를 보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경기장을 등지고 선 채,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의 목소리가 되는지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그들의 '경기'였다.
[Popom, 전 Angers Kop de la Butte 카포]
카포(Capo)란 무엇인가
오늘날 흔히 쓰이는 '콜리더'라는 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의 카포(Capo), 혹은 '카포치포(Capotifo)'를 만나게 된다. 경기장이 아니라 관중석을 마주보고 서서, 등을 그라운드에 내어준 채 목청 하나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 1960년대 말 이탈리아 울트라스 문화에서 처음 뿌리내린 이 자리는, 1968년 결성된 AC 밀란의 서포터 그룹 '포사 데이 레오니(Fossa dei Leoni)'를 시초로 전 유럽과 세계로 번져나갔다.
전명준을 단지 '콜리더'가 아니라 '부천 최초의 카포'라 다시 부르는 일은, 단순한 명칭 정정이 아니다. 그 시절 그는 공을 보지 않았다. 듬성듬성 흩어져 선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눈을, 그들의 흔들리는 어깨를 바라보며 목이 터지도록 구호를 먼저 외쳤다. 형태도, 정신도, 이미 완벽한 카포의 자리였다.
동대문에서 싹튼 인연
전명준은 K리그 초창기부터 전국의 경기장을 떠돌던 축구광이었다. 부천 유공을 비롯한 여러 팀이 동대문운동장을 한 지붕 아래 나눠 쓰던 시절,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를 중심으로 노래하고 구호를 외치고 북을 치는 유럽식 서포팅 문화가 이 땅에 막 첫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정 구단보다 축구 그 자체를 사랑했던 그였지만, 응원석에서 피어오르던 이 낯설고 뜨거운 열기에 그는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1996년 목동, 텅 빈 응원석의 기적
1996시즌 아디다스컵 개막전, 서울 목동운동장. 수원삼성의 창단과 함께 동대문 시절 부천을 응원하던 젊은 팬 대다수가 수원의 응원석으로 옮겨간 뒤였다. 목동의 부천 응원석은 차갑고, 텅 비어 있었다. 그날, 양원석은 홀로 그 넓은 콘크리트 위에 서 있었다.
그때, 낯익고 호탕한 목소리 하나가 정적을 갈랐다.
"야! 원석아! 딴 애들은 다 어디 가고 너 혼자냐?"
1995년 동대문에서 몇 차례 인사를 나누었던 전명준이었다. 사정을 전해 듣자, 그는 망설임 한 점 없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던지고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고 함께 온 일행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나 오늘 여기서 얘랑 응원할 테니까, 너희는 편한 데 가서 봐라."
이미 1995년부터 동대문에서 응원 구호와 선수 콜을 모두 익혀둔 그는, 그 길로 경기장을 등지고 텅 빈 관중석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목청껏, 아무도 듣지 않을지도 모를 이름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 경기도 내가 올 테니까, 같이 하자"
경기가 끝난 뒤, 전명준은 홀로 자리를 지켜온 양원석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오늘처럼 이렇게 혼자 하면 너무 힘들지 않겠냐?"
그래도 어떻게든 계속 부천을 응원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단단한 미소와 함께 약속 하나를 건넸다.
"알았다. 다음 경기도 내가 올 테니까 같이 하자."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 홈경기에도, 또 그다음 경기에도 어김없이 목동에 나타나 응원석의 맨 앞에 섰다. 얼어붙어 있던 목동의 응원석에는, 그의 목소리를 등대 삼아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했다. 텅 빈 자리를 채운 것은 화려한 이벤트도, 구단의 마케팅도 아니었다. 약속을 지킨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1996년 시즌 마지막 경기 후)
한 팀만의 팬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
당시 한국 프로축구에는 '한 구단만의 서포터'라는 개념이 명확히 서 있지 않았다. 전명준 역시 일화를 비롯한 여러 구단의 경기를 즐겨 보던 축구 덕후였지만, 1996년 목동 개막전의 그 약속 이후로는 부천 응원석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자 붙박이가 되어주었다.
1997년을 전후해 형성된 초창기 붉은악마 고정 멤버들 가운데서도 그는 가장 연배가 높은 큰형님이었다. 넓은 인맥과 털털한 성품으로,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한국 서포터 문화의 울타리가 되어준 사람으로 많은 이들은 그를 기억한다.
1996년과 1997년, 갓 태동한 유공 서포터즈의 현장과 모임을 담은 사진들 속에는 언제나 그가 한쪽 구석에 서 있다. 초창기 붉은악마의 맨 앞자리에서도, 카메라가 어디를 향하든 그의 모습만은 빠지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중심에 세우려 하지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1997년 겨울 숙소 방문)
'뺀질이 명준형님'
2008년, 하이텔 축구동호회 시절의 인연들이 모여 남긴 한 회고 글 속에서 그는 "뺀질이 명준형님"이라는 정겨운 별명으로 등장한다. 한참 동안 딸 진아 자랑을 늘어놓던 소탈한 모습. 그는 응원석을 호령하던 카포이기 이전에, 십수 년의 세월을 축구 하나로 함께 늙어간 따뜻한 친구이자 형이었다.
바톤을 넘기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응원석에는 젊은 피들이 물밀듯 들어왔다. 응원석이 청춘들의 함성으로 다시 채워지기 시작하자, 전명준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다.
"이젠 열정적인 젊은 친구들이 많아졌으니, 그 친구들이 이 역할을 나보다 훨씬 잘 해줄 거라 믿는다. 난 이제 내가 있어야 할 자연스러운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내 팀을 응원해야지."
양원석이 아무도 없던 텅 빈 응원석을 끝까지 홀로 지켜낸 사람이었다면, 전명준은 그 쓸쓸한 자리 옆으로 선뜻 다가와, 아무도 걸어본 적 없던 '카포'의 길을 처음으로 함께 걸어준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리더십에 대한 깊은 울림을 던진다.
"리더는 응원석의 가장 화려한 중심에 서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응원석이라 할지라도, 가장 먼저 발을 디딜 수 있는 사람이다."
부천의 축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니폼니쉬 감독을 그라운드 위의 근본으로 존경한다. 마찬가지로 그라운드 밖 응원석의 근본을 이야기할 때는, 마땅히 전명준을 최초의 카포로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의 근본이다.
남겨진 이야기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안타깝게도 세월의 무게 탓에, 그의 발걸음은 예전처럼 경기장 계단이 아니라 병원과 집 사이를 오가는 일이 더 잦아졌다고 전해진다.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지는 N석이 아니라, 집 안의 작은 TV 화면을 통해 경기를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해, 부천 창단 30주년을 기념하는 경기에서 그는 시축자로 그라운드를 다시 밟았다. 텅 빈 응원석 앞에서 처음 목청을 틔웠던 그 사람이, 30년이 흐른 뒤 가득 찬 함성 한가운데서 공을 굴렸다. 그것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가 그 시작을 잊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명이었다.

(2025년 30주년 기념 시축후)
'응원'이라는 소박한 말이 '서포터즈'라는 이름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물줄기가 처음 시작된 자리에 전명준이 있었다. 그는 오늘의 부천을 설계한 사람도, 무언가를 증명하려 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아무도 서 있지 않던 자리에 가장 먼저 서서, 그 뒤로 이어질 모든 이들의 물길을 터준 사람이었다.
비록 경기장에 매일 서지 못할지라도, 스탠드 위 그의 자리가 지금은 비어있을지라도 — 우리가 기억하는 전명준은 영원히, 1996년 어느 추운 날 목동의 텅 빈 응원석에서 "내가 해줄 테니까 같이하자"라며 팔을 걷어붙이던 바로 그 청년으로 남는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부천의 역사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증표다.
이제 그가 놓아준 그 거대한 유산 위에서, 우리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른다. 비록 화면 너머에서 홀로 경기를 지켜보고 계실지라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 시절 목동의 붉은 함성 속에서, 그리고 축구라는 뜨거운 세계 안에서,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뛰며 우리를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시작을 함께해준 그에게, 우리는 진심 어린 리스펙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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